밥그릇 싸움 양상은 정치판이 그나마 순진한 편이다. 의원을 오래 해먹은 사람을 바꿔보려고 하고, 불체포특권 폐지 등 실행은 안되지만 뭔가 해보려는 시늉이라도 계속한다. 상대 당 견제도 있고, 선거 표가 무서워 국민 다수가 지금 의료계 집단행동처럼 반대하면 포기할 줄도 안다. 무엇보다 국민을 상대로 겁박하지 않는다.
반면 의료계는 의사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든 게 요지부동이다. 비대면 진료도 의사들이 난리쳐서 재진 등에 한해 반쪽 시행에 그쳤고, 간호사 업무 범위를 명시하려는 법 제정 시도에도 집단 반발했다. 모두 환자 걱정을 내세우지만 속내는 ‘밥그릇 지키기’라는 것을 많은 국민이 알기에 분노는 더 끓는다.
‘사명감’ ‘타인을 위해 살겠다’ ‘온전히 환자를 위해 바치겠다’...이 말대로라면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나고 의대생들이 동맹휴학에 나서긴 힘들 것 같다. 환자를 위해 살겠다는 그들의 신념을 꺾기 위해 정부와 국민이 의사 일 하지 못하게 막은 것도 아니다. 의사가 2000명 늘어나니 본인들의 직업적 숭고성이 차별화되지 못해 기분 나쁜 것인가. 일반 국민은 의료인들에게 슈바이처 박사나 이태석 신부가 되어달라는 게 절대 아니다. 그럴듯한 말로 자신들을 합리화하고 국민이 어리석게도 호도되어 주길 기대해선 안된다.
의대 입학 정원을 늘리는 게 국가 전체에 무슨 해를 주는 것인지 나로선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로스쿨 출신 변호사가 늘면서 법률시장 문턱이 낮아졌듯이 의사 공급이 증가해 국민이 혜택 받을 기회가 더 생긴다면 좋을 일이다. 의사가 많아져 돈벌이가 예전만 못하게 되면 의대 진학 열기가 떨어져 다른 전공으로 돌리는 결과를 낳는다면 이 또한 과히 나쁘지 않다.
2000명 증원을 해도 정부 뜻과 달리 지방·필수의료로 가는 비율이 저조할 것이라는 예상은 틀리지 않는다. 정부가 필수의료 수가를 높이더라도 피부·성형과 돈벌이를 못 따라간다면 2000명 중 90% 이상은 비필수 쪽으로 갈 것이다. 지금도 비급여 피부미용·성형 시장은 시술 수요가 많고 비용은 인플레이션을 반영해 계속 올라간다. 그러니 많은 의사들이 전과를 해서라도 이 시장에 참여한다. 일각에서는 일정 자격을 갖추면 누구나 시술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도 한다. 이래저래 경쟁이 극심해지면 수익 감소로 일부 의사는 필수의료로 돌아올 것을 기대해볼 수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의대생들이 모두 의사가 될 필요도 없다. 연구하는 의사과학자나 제약·바이오 기업 창업도 할 수 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이달 초 “다시 한다면 생물학을 공부하겠다”면서 미래 먹거리로 신약 개발을 강조했다. 그가 “AI를 활용한 생명공학이 유망한 산업이 될 것”이라고 했는데 많아진 의대생 중 일부가 신약 분야에 뛰어들어 국가경제에 새로 기여할 수도 있다.
(서울=연합뉴스) 김도훈 기자 =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정책에 반발한 전공의들의 집단행동 사흘째인 22일 서울 시내의 한 공공병원에 의료연대본부가 작성한 필수·지역·공공의료 확대 촉구 성명서가 걸려 있다. 2024.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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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의료계는 의사가 많아지면 병원 방문자가 늘어 과잉진료가 양산되고 건보 재정이 악화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건보 재정 파탄은 국민 전체가 정부를 심판할 일이지 의사 홀로 나설 일이 아니다. 언제부터 그들이 국가 자금 사정까지 걱정했는지 모르지만 그보다는 병원과 의사 임의로 비급여 진료 부담이 커지는 게 더 문제다.
의대 정원이 늘면 의사 수준이 떨어진다는 주장도 말이 안된다. 본인이 대학을 다닌 1990년대만 해도 서울대 의대가 지금처럼 이과에서 가장 높은 과가 아니었다. 문과 지원에서 떨어진 뒤 서울 포함 수도권 의대에 후기 입시로 붙은 사람도 많다. 문과생들의 의대 편입도 종종 있었다. 지금처럼 지방 의대까지 최상위 학생들이 싹쓸이로 몰려가는 구조가 아니었다. 2000명이 늘더라도 30여년 전보다 평균적으로 점수 높은 사람들이 의대에 갈 것이니 후배들의 실력을 과소 평가할 필요는 없다.
의대 입시 과열을 부추기는 부작용을 감안하면 개인적으론 2000명이 좀 많다는 느낌도 있다. 하지만 정부가 의대 제안을 취합해 결론 낸 사안을 두고 백지화까지 외치는 것은 말이 안된다. 차라리 정부 뜻대로 2000명을 받고 나서 의료 교육 현장이 엉망이 되면 그 때 가서 정부에 책임을 물으면 된다. 후진 교육으로 ‘돌팔이 의사’를 양산할 것 같으면 국민도 의사들과 함께 무작정 증원에 항거할 것이다.
김정은 서울대 의대 학장이 27일 졸업식 축사에서 “여러분은 자신이 노력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지만 사회에 숨어 있는 많은 혜택을 받고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라고 한 말은 의사뿐 아니라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되새겨볼 만하다. 교사들이 이참에 억울하고 힘들다며 학교를 뛰쳐나오고, 군인들이 나라 지키기 싫다며 전방을 이탈하고, 경찰이 치안을 방치한다면 의사들 파업 이상으로 끔찍한 일일 것이다. 그들도 어렵고 할 말은 많지만 묵묵히 일터를 지켜주고 있는 게 감사할 따름이다. 이들에게 의료계 집단행동은 돈과 명예를 자기들만 계속 갖겠다는 걸로 비친다.
정부는 이번 만큼은 의료계와의 대결에서 회피를 택해선 안된다. 이번에도 정부가 어물쩡 넘어간다면 정부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의료계가 제아무리 명분이 있다고 해도 병원을 떠나는 것은 생명을 살리는 존엄한 존재 이유를 걷어찬 것이다. 의대 정원 증가가 국가 보건에 ‘절대악’이어서 집단행동까지 벌이는 것인지 의료인들에게 묻고 싶다. 주변을 돌아보면 그대들이 지금 가진 것만도 충분한데 말이다.
김병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