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판보다 더한 의료계 ‘밥그릇 싸움’ [핫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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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2.28. 오후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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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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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사협회 비대위가 25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에서 전국 시·도 의사회의 장 등이 참여하는 대표자 확대회의를 가진 가운데 참헉자들이 의대 정원 확대 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4.2.25. [이승환기자]
상투적 표현이긴 하지만 치열한 ‘밥그릇 싸움’이 요즘 두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정치판과 의료계다. 밥그릇이라는 표현에 대해 국회의원 후보자들은 그러려니 여기는 반면 의사들은 절대 아니라고 외친다. 자기들은 마치 숭고한 사명이라도 가진양 ‘밥그릇’이라는 단어가 주는 천박함에 치를 떤다. 하지만 인간은 본래 남이나 공동체 전체가 겪는 심대한 고통보다 내 손톱 밑 작은 가시가 더 아프고 신경쓰이는 법이다. 그래서 의사들이 병원을 떠나 밖으로 뛰쳐나간 것도 한편으로 이해는 간다.

밥그릇 싸움 양상은 정치판이 그나마 순진한 편이다. 의원을 오래 해먹은 사람을 바꿔보려고 하고, 불체포특권 폐지 등 실행은 안되지만 뭔가 해보려는 시늉이라도 계속한다. 상대 당 견제도 있고, 선거 표가 무서워 국민 다수가 지금 의료계 집단행동처럼 반대하면 포기할 줄도 안다. 무엇보다 국민을 상대로 겁박하지 않는다.

반면 의료계는 의사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든 게 요지부동이다. 비대면 진료도 의사들이 난리쳐서 재진 등에 한해 반쪽 시행에 그쳤고, 간호사 업무 범위를 명시하려는 법 제정 시도에도 집단 반발했다. 모두 환자 걱정을 내세우지만 속내는 ‘밥그릇 지키기’라는 것을 많은 국민이 알기에 분노는 더 끓는다.

23일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 환자와 의료진이 분주하게 움직이고있다. 2024.2.23 [김호영기자]
지난 23일 TV 토론에서 김건민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학생협의회(의전협) 비대위원장은 “학창 시절부터 수년 동안 의사라는 사명감 있는 직업을 꿈꾸고 열심히 공부해서 의과대학에 들어왔고, 평생 직업으로 타인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또 “의과대학에 온 후에도 잠 못 자면서 배우고 학습한 지식을 나중에 온전히 환자를 위해 바칠 걸 그 어린 나이부터 결심했다”고도 했다. 지금 의료 파업 시국에 국민은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사명감’ ‘타인을 위해 살겠다’ ‘온전히 환자를 위해 바치겠다’...이 말대로라면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나고 의대생들이 동맹휴학에 나서긴 힘들 것 같다. 환자를 위해 살겠다는 그들의 신념을 꺾기 위해 정부와 국민이 의사 일 하지 못하게 막은 것도 아니다. 의사가 2000명 늘어나니 본인들의 직업적 숭고성이 차별화되지 못해 기분 나쁜 것인가. 일반 국민은 의료인들에게 슈바이처 박사나 이태석 신부가 되어달라는 게 절대 아니다. 그럴듯한 말로 자신들을 합리화하고 국민이 어리석게도 호도되어 주길 기대해선 안된다.

의대 입학 정원을 늘리는 게 국가 전체에 무슨 해를 주는 것인지 나로선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로스쿨 출신 변호사가 늘면서 법률시장 문턱이 낮아졌듯이 의사 공급이 증가해 국민이 혜택 받을 기회가 더 생긴다면 좋을 일이다. 의사가 많아져 돈벌이가 예전만 못하게 되면 의대 진학 열기가 떨어져 다른 전공으로 돌리는 결과를 낳는다면 이 또한 과히 나쁘지 않다.

2000명 증원을 해도 정부 뜻과 달리 지방·필수의료로 가는 비율이 저조할 것이라는 예상은 틀리지 않는다. 정부가 필수의료 수가를 높이더라도 피부·성형과 돈벌이를 못 따라간다면 2000명 중 90% 이상은 비필수 쪽으로 갈 것이다. 지금도 비급여 피부미용·성형 시장은 시술 수요가 많고 비용은 인플레이션을 반영해 계속 올라간다. 그러니 많은 의사들이 전과를 해서라도 이 시장에 참여한다. 일각에서는 일정 자격을 갖추면 누구나 시술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도 한다. 이래저래 경쟁이 극심해지면 수익 감소로 일부 의사는 필수의료로 돌아올 것을 기대해볼 수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의대생들이 모두 의사가 될 필요도 없다. 연구하는 의사과학자나 제약·바이오 기업 창업도 할 수 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이달 초 “다시 한다면 생물학을 공부하겠다”면서 미래 먹거리로 신약 개발을 강조했다. 그가 “AI를 활용한 생명공학이 유망한 산업이 될 것”이라고 했는데 많아진 의대생 중 일부가 신약 분야에 뛰어들어 국가경제에 새로 기여할 수도 있다.

병원에 걸린 필수·지역·공공의료 확대 촉구 성명서
(서울=연합뉴스) 김도훈 기자 =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정책에 반발한 전공의들의 집단행동 사흘째인 22일 서울 시내의 한 공공병원에 의료연대본부가 작성한 필수·지역·공공의료 확대 촉구 성명서가 걸려 있다. 2024.2.22
superdoo82@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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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계는 의사가 많아지면 병원 방문자가 늘어 과잉진료가 양산되고 건보 재정이 악화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건보 재정 파탄은 국민 전체가 정부를 심판할 일이지 의사 홀로 나설 일이 아니다. 언제부터 그들이 국가 자금 사정까지 걱정했는지 모르지만 그보다는 병원과 의사 임의로 비급여 진료 부담이 커지는 게 더 문제다.

의대 정원이 늘면 의사 수준이 떨어진다는 주장도 말이 안된다. 본인이 대학을 다닌 1990년대만 해도 서울대 의대가 지금처럼 이과에서 가장 높은 과가 아니었다. 문과 지원에서 떨어진 뒤 서울 포함 수도권 의대에 후기 입시로 붙은 사람도 많다. 문과생들의 의대 편입도 종종 있었다. 지금처럼 지방 의대까지 최상위 학생들이 싹쓸이로 몰려가는 구조가 아니었다. 2000명이 늘더라도 30여년 전보다 평균적으로 점수 높은 사람들이 의대에 갈 것이니 후배들의 실력을 과소 평가할 필요는 없다.

의대 입시 과열을 부추기는 부작용을 감안하면 개인적으론 2000명이 좀 많다는 느낌도 있다. 하지만 정부가 의대 제안을 취합해 결론 낸 사안을 두고 백지화까지 외치는 것은 말이 안된다. 차라리 정부 뜻대로 2000명을 받고 나서 의료 교육 현장이 엉망이 되면 그 때 가서 정부에 책임을 물으면 된다. 후진 교육으로 ‘돌팔이 의사’를 양산할 것 같으면 국민도 의사들과 함께 무작정 증원에 항거할 것이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서울대병원분회 조합원들이 2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앞에서 열린 공공병원 및 의대정원 확대 요구 기자회견에서 피켓을 들고 있다. 2024.2.27 [김호영기자]
전공의들은 주 80시간 이상 일하며 최저임금 정도 받는다는 고생담을 말하면서 왜 병원 측에는 지금처럼 집단항의로 이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는지 이상한 일이다. 직장 상사와 선배들을 상대로 험한 일을 벌이기 싫고, 조금만 참으면 미래에 더 나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어 방치해온 것인가. 병원이 전공의를 값싸게 쓰는 잘못된 관행을 그들 스스로 바꾸는 것은 놔둔 채 이번 일이 터지니 “우린 힘들다”며 이참에 파업하는 게 궁색해 보인다. 전공의 처우는 소속 병원과 1차적으로 협의하고 정부에 수가 조정을 요구할 일인데 그간의 고생을 몰라준데 대해 항의라도 하듯 병원을 떠나니 어리둥절하다.

김정은 서울대 의대 학장이 27일 졸업식 축사에서 “여러분은 자신이 노력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지만 사회에 숨어 있는 많은 혜택을 받고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라고 한 말은 의사뿐 아니라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되새겨볼 만하다. 교사들이 이참에 억울하고 힘들다며 학교를 뛰쳐나오고, 군인들이 나라 지키기 싫다며 전방을 이탈하고, 경찰이 치안을 방치한다면 의사들 파업 이상으로 끔찍한 일일 것이다. 그들도 어렵고 할 말은 많지만 묵묵히 일터를 지켜주고 있는 게 감사할 따름이다. 이들에게 의료계 집단행동은 돈과 명예를 자기들만 계속 갖겠다는 걸로 비친다.

전공의 파업이 이어지는 가운데 25일 오후 한덕수 국무총리가 경기 성남시 분당구 국군수도병원을 방문, 민간인 중환자 가족들을 격려하고, 석웅 국군수도병원장(맨 오른쪽) 등 의료진을 격려하고 있다. 2024.02.25[[청사사진 기자단]
최근 방영 중인 TV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 지방 호족들이 자신들이 가진 자금과 병력, 위세를 이용해 고려 왕(현종)을 겁박하며 강대강 대치를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호족들은 현종을 면전에서 능욕하며 그를 죽이기 직전까지 간다. 하지만 현종의 위엄과 결단에 찬 모습에 호족들은 결국 왕 앞에 무릎을 꿇는다. 궁중 신하들은 “국가 기강을 바로세워야 합니다”라며 충언한다. 지금 대다수 국민도 정부의 엄정한 대응과 이를 통한 나라 기강 확립을 원한다. “정부는 의사를 이길 수 없다”는 일부 의사들의 방자한 발언은 지방호족들이 국왕과 백성을 겁박했던 것과 다를 게 없다.

정부는 이번 만큼은 의료계와의 대결에서 회피를 택해선 안된다. 이번에도 정부가 어물쩡 넘어간다면 정부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의료계가 제아무리 명분이 있다고 해도 병원을 떠나는 것은 생명을 살리는 존엄한 존재 이유를 걷어찬 것이다. 의대 정원 증가가 국가 보건에 ‘절대악’이어서 집단행동까지 벌이는 것인지 의료인들에게 묻고 싶다. 주변을 돌아보면 그대들이 지금 가진 것만도 충분한데 말이다.

김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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