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5일. 서울중앙지방법원 박정제 부장판사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게 내린 무죄 판결은 많은 사람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재벌총수의 ‘인적자본’에 대한 시장가치를 연구해 온 나에게 이는 기회이기도 했다. 무죄를 예측한 사람이 극소수였다는 점에서 이번 판결은 이 회장 경영능력에 대한 시장 평가를 가늠케 한 ‘자연실험’과도 같다. 그 결과를 보자.
선고 당일부터 3일 동안 코스피 누적수익률은 0.2% 상승했지만 삼성전자의 주가는 1.5%,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주가는 5.2% 하락했다. 적어도 이들 회사의 주주들은 이 회장의 무죄를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다른 반응도 있다. 삼성물산과 삼성생명의 주가는 각각 5.2%와 5.9% 올랐다. 이는 총수에 대한 실형 선고가 그룹 전반에 미치는 효과는 엇갈리며, 따라서 ‘총수가 부재해도 기업과 국가 경제가 망가지는 일은 없다’는 기존 연구와 맥이 닿는다. 이를 염두에 두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보자. ‘이재용 회장에게 좋은 것이 언제나 삼성그룹과 대한민국에 좋은 것인가?’
GM CEO의 세기적 발언
사실 이 질문은 패러디한 것이다. 발언의 원조는 미 제너럴모터스(GM)의 최고경영자(CEO) 찰스 윌슨이다. 1953년,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은 그를 국방부 장관에 지명했다. 그가 지명 이후에도 2400만 달러의 GM 주식을 매각하지 않은 게 논란이 됐다. 청문회에서 이를 지적하는 의원들에게 그는 “제너럴모터스에 좋은 것이 미국에 좋은 것이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고 답변했다. 두고두고 후대에 회자되는 발언이었다.
이 말 속에 담긴 메시지에 사실 한국처럼 거부감이 적은 나라도 없다. 전 세계 어디에도 우리처럼 세계 10위권 수준의 경제 규모를 갖은 나라에서 채 100명도 되지 않는 특정 가문에 경제력이 집중된 나라는 없다. 이러한 극단적인 경제력 집중 현상은 개별 기업에 닥친 충격의 여파가 거시경제 전반의 위험으로 쉽게 전이될 위험을 낳는다는 점에서 논란의 도마 위에 오른다.
최근 연구들은 소수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이 국민경제적 측면에서 경계해야 할 현상이 되는 또 다른 논거를 제시한다. 이 논의는 재벌 계열사들이 독립기업보다 자본을 더 많이 그리고 더 쉽게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재벌 계열사는 ‘기업집단 내 자본시장’을 활용한다. 다른 계열사의 자산에 쉽게 접근 가능하다는 얘기다. 계열사 출자가 그 좋은 예이다. 이로 인해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는 비 재벌에 비해 더 비효율적으로 운영되는 재벌에 자본이 집중될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재벌 내에서도 생산성이 낮은 계열사에 자본이 몰릴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삼성전자나 현대차와 같은 우리나라 대표 기업들은 이미 매우 높은 생산성과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어떤 회사, 예컨대 삼성전자의 평균 생산성이 높다고 해도 과도한 수준의 생산요소가 집중될 경우 한계생산성은 낮아질 수 있으며 나아가 국민 경제 전체의 생산성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더 나아가 그 회사가 과거 이재용 회장의 후계자 양성 계획의 일환으로 계열사의 전폭적 지원을 받았던 ‘이(e) 삼성’과 같은 경우라면 이런 자본 배분의 비효율성 문제는 더 악화할 것이다. (이 삼성은 결국 청산됐다).
사실 재벌의 역사는 계열사 간 출자를 레버리지 삼아 그 덩치를 확장한 역사로 볼 수도 있다. 예컨대 2011년 씨제이(CJ) 그룹은 대한통운 인수자금 1조8천억원 중 절반은 씨제이제일제당에서 조달했다. 이러한 지분인수는 씨제이제일제당의 독자 판단으로 그룹은 설명했으나 실제는 이 기업의 출자 여력이 다른 계열사에 비해 많았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팽배했다. 만약 씨제이제일제당이 대한통운보다 생산성이 더 높음에도, 총수의 이익을 위해 자금이 대한통운으로 이전되었다면 이 자금은 그 이전보다 덜 효율적으로 사용하게 됐다는 걸 의미한다. 이는 씨제이 그룹 내부의 자원배분 효율성이 하락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출자가 재벌 내에 만연하다면 이는 국민경제 차원에서도 심각한 문제로 부상한다.
총수 중심 의사결정, 그룹은 물론 국민경제에도 악영향
한국개발연구원(KDI) 조덕상 박사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따져본 몇 안 되는 연구자다. 그는 2006년부터 2015년까지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이 자원배분 효율성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을 계산했다. 그는 이 기간에 재벌의 자본과 노동투입량은 늘었음에도 국민경제 전체의 총요소생산성(TFP) 증가율이 2010년을 기점으로 크게 둔화했음을 발견했다. 조 박사는 여기에 재벌의 책임이 크다고 주장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2012년부터 2015년 사이 한국경제의 총요소생산성 증가율은 연평균 0.3% 감소했는데 이는 기업 간 자원배분 효율성 증가율이 연평균 1.9% 감소한 것에 기인했다. 이 중 재벌 계열사의 자원배분 비효율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80%였다는 얘기다.
미국 예일대 성지훈 박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성 박사는 그 원인을 재벌 총수의 경영권 세습에 주목했다. 그는 경영권 승계를 위해 지주회사를 설립하거나 총수의 보유 지분이 많은 기업에 일감을 몰아주는 결정이 재벌 내부의 자원배분 효율성을 훼손한다고 봤다.
실제 그는 삼성·현대그룹 등의 창업자 사망 뒤 계열분리를 경험한 회사들이 그 이전에 비해 자원배분 효율성이 늘었음을 확인했다. 구체적으로 계열사 간 출자 관행이 사라진다면 총요소생산성이 약 9% 정도 개선된다는 반사실적(counterfactual) 결과를 그는 제시하며, 한국경제의 자원배분의 비효율성의 3분의 1이 재벌 내부의 자원배분 비효율성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재벌 규제는 성장 정책
이런 연구들은 재벌 규제에 새로운 시사점을 제공해준다. 먼저 내부거래의 적절성에 대한 심사를 가격이나 거래조건에만 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조건이 공정하여도 심각한 자원배분 효율성 하락이 발생한다면 규제 필요성이 크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재벌정책을 대리인 비용 감소를 위한 지배구조 개선 문제로 국한해서는 안 된다는 함의도 있다. 다시 말해 재벌 정책은 생산성의 하락으로 저성장 기조가 장기화하고 있는 한국경제에 자원배분의 효율성과 경제적 역동성을 높여줄 적극적 ‘성장정책’으로 재해석해야 한다. 이게 바로 구조개혁이다.
이제 서두의 질문에 답해보자. 진실이 단순한 것처럼 이 질문에 대한 답변 또한 단순하다. 이재용 회장에게 좋은 것은 결국 그와 그 가족에게만 좋은 것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국민경제는 물론 삼성 그룹에 좋다는 근거는 희박하다. 최소한 지금까지의 경험과 여러 연구는 이를 증명한다. 만약 제대로 능력을 평가받아본 적 없는 이 회장이 무죄 판결을 계기로 경영 전면에 나선다면 이는 삼성그룹과 대한민국에 불확실성을 더하는 셈이 된다.
안타까운 것은 그런 이회장에게 우리 경제가 너무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인공지능(AI) 반도체 열풍이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의 주된 화두가 된 올해 들어 에스케이(SK)하이닉스 주가는 14% 상승했으나 삼성전자는 8% 하락했다. 실기한 파운드리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위상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이게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최한수 경북대 교수(경제학)